선각국사 도선     혜철국사와 제자 선각국사 도선과의 관계
              
    인악대사
                 
동진대사
                 
원효스님            원효의 발자취을 찾아서
                                             
 원효가 이 석굴에서 수도하여 진리를 깨달았다고 전한다하는  서당굴(誓幢窟)
                                             
 불광산 장안사 척판암과 천성산(원효산) 내원사.
                 
심지왕사스님
                 
보조국사지눌     범해 선사의 (동사열전)의 보조국사 지눌의 이야기
                                           
  보조국사의 선사상  

 

 

 

 



 




 

 

 

 

 

 

 

 

 

 

 

 

 

 

 

 

 

 

 

 

  

 

인악대사(仁嶽大師)

 

 

 

   동화사 주 출입문이 지금은 서쪽으로 옮겨 웅장한 동화문으로 바뀌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남쪽으로 난 출입문 봉황문이 있었다.

   동화교에서 과거 상가가 있던 길로 접어들면 좌측은 세계적인 규모라고 하는 통일 대불과 그 관련시설들이 있고, 곧장 올라가면 '팔공산동화사봉황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 나온다.

  거기서 조금더 올라가면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가 나오고 옆으로 보면 인악당이라는 퇴락해서 조금은 음침한 여느 비와는 달리 비신 받침을 봉황으로 한 비각이 나온다. 바로 '인악대사비(仁嶽大師碑)'인데 이 비문에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악스님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인악대사(仁嶽大師)의 속성(俗姓)은 李氏, 본관(本貫)은 성산(星山), 휘(諱)는 의소(義沼), 字는 자의(子宜), 법호(法號)를 인악(仁嶽)이라 하였다.

  고려 사공(司空)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능일(能一)의 23世孫이며 부(父)는 휘징(徽澄)이고 모(母)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이다 .

   스님의 이름은 의첨, 영조 22년(1746)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에서 태어났다.

   8세에 향학에 들어가 소학을 배우는데 한번 듣고 세 번 읽으면 곧 외워버리니, 신동이라 했다.  15세에 시전, 주역을 읽고 깊은 뜻을 헤아렸으며 문장에도 능하니, 재질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됨됨이 또한 더할 나위 없으니 고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18세에 인근의 용연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했는데 스님들의 정진 모습에 깊게 감동을 받은 나머지 불교에 귀의하고 말았다.

   스승인 벽봉(碧峰)이 그가 큰그릇임을 알고 금강경, 능엄경등을 가르치고 나아가 당시 고승들이었던 서악스님, 추악스님, 농암 스님에게도 배우게 하니, 그 이론이 해박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벽봉(碧峰)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으니 스님의 나이22세였다. 뒤에 영원정사에서 화엄종장(華嚴宗長)으로 있던 상언을 만나 화엄경(華嚴經)의 진리를 터득하니 불교의 심오한 이치를 깊이 깨달았다.

   비슬산, 계룡산, 황악산 등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많은 후학을 지도하다가 동화사(桐華寺)로  돌아왔다.
정조 14년(1790) 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원에 용주사를 창건하여 불상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당시 이름난 스님으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니 스님이 뽑혔다.

    이때 스님이 불복장원문경소와 용주사제신장문을 지으니, 정조가 그의 문장에 감탄한 나머지 스님 중 조선 제일의 문장가라 칭찬하고 홍제(弘濟)라는 호를 내리시며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정조 20년(1796), 용연사 명적암에서 돌아가시니 세수51세, 법랍 34세였다.
   저서로 화엄사기, 원각사기, 기신론사기, 인악집 등이 있다.

   사기(私記)는 경론(輕論)을 강의하면서 여러 학설을 모으고 자기의 견해를 덧붙인 것을 말한다. 인악스님은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많은 저술활동을 한 분이다.

   스님의 활동기인 영. 정조대를 한국의 문예부흥기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는 여전히 지식인들로부터 천대받던 시기였다.
스님은 당대 거유였던 매산(梅山) 홍직필(1776∼1852)과 교분을 맺고 있었는데, 그만큼 스님의 유학이 깊은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산(梅山)은 스님을 일러 '유생인지 스님인지 모를 정도'라고 평했다고 한다.

    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유교와 불교는 물론 도교까지 융화할 것을 주장했으며, 특히 많은 스님 중에서 유불 이교회통(離敎會通)을 주장한 스님이셨다.

   오늘날 사회를 선도해야 할 종교마저 배타적으로 자기들만의 몫만 주장하는           용연사 인악대사부도          현실에서 스님은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