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각국사 도선     혜철국사와 제자 선각국사 도선과의 관계
              
    인악대사
                 
동진대사
                 
원효스님            원효의 발자취을 찾아서
                                             
 원효가 이 석굴에서 수도하여 진리를 깨달았다고 전한다하는  서당굴(誓幢窟)
                                             
 불광산 장안사 척판암과 천성산(원효산) 내원사.
                 
심지왕사스님
                 
보조국사지눌     범해 선사의 (동사열전)의 보조국사 지눌의 이야기
                                           
  보조국사의 선사상  

 

 

 

 




























 



 

 

 

 

 

 

 

 

 

 

 

원효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오도암 서당굴 : 오도암(悟道庵)은 팔공산 제일의 명당으로 알려진 절터이다.  팔공산 비로봉 청운대 절벽 밑에 자리했다.

   팔공산에서 진부암, 삼성암과 함께 삼고소사암(三高所寺庵)이다. 이 절은 원효대사가 수도하여 오도(悟道)한 곳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오도암(悟道庵)이라  한다.

임신년(壬申, 1932년) 석천산인(石泉散人) 홍재하 찬(洪載夏 撰) 오도암(悟道庵) 중건기에
羅時有五法侶開山 結茅修禪悟道 故元曉大師因創是庵而名之
라시유오법려개산 결모수선오도 고원효대사인창시암이명지

라는 글이 있다.

    조선 이래의 팔공산이라는 산명은 원효대사의 제자 일천중(一千衆)이 양산 천성산(원효산)에서 원효문화(元曉門下)에서 수업하고 수도하여 988인이 오도(吾道)하고 나머지 12인중 8인이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에 가서 오도(悟道)하여 팔공산이라 하고 4인이 문경(聞慶) 대승사(大乘寺)에 가서 오도(悟道)하여 사불산(四佛山)이라 했다 한다.

    팔공산에  들어온 8인 가운데 3인은 삼성암(三聖庵)에 오도하여 삼성암(三聖庵)이라 했고 5인이 오도암(悟道庵)에서 오도(悟道)했다하여 오도암(悟道庵)이라 했다는 전승이 내려왔다.
  그러나 8인이 팔공산(八公山)에 입산 오도(悟道)하여 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는 것은 팔공 자를 가지고 만든 전설인 듯하다.

    이 산이 신라시대에는 공산 혹은 부악(父岳) 혹은 중악(中惡)이라 불렀고 팔공산(八公山)이라 하지 않았다.  팔공산(八公山)이라 한 것은 조선시대 때부터 부르기 시작한 명칭이다.
그러나, 사불산은 진평왕 9년 갑신(甲申) 즉, 원효(元曉)가 나기 30년 전에 벌써 있었다는 전설이 고려시대까지 내려왔고 이 때 대승사(大乘寺)가 창건된 듯하다.

  이와 같이 8인의 팔공산 입산과 4인의 사불산 입산 설화는 후대의 조작인 듯 하다.
이 설화가 오도암(悟道庵) 원효 설화와 같이 위와 같은 오도암(悟道庵) 유래(由來)를 낳았다
오도암(悟道庵)은 원효(元曉)의 증오처(證俉處)로 전승(傳乘)되었다.
증오(證俉) : 불도를 닦아 대도(大道)를 깨닫는 것

  전설에 따른 원효굴 탐사 소개문 (매일신문 88년 11월 4일자에 <원효대사 득도 석굴 발견> 제목으로 보도된) 내용을 적어본다.

  해발 1050m 청운대 정상 가까이의 절벽에서 원효굴을 찾았다.
굴의 규모는 길이 280cm, 굴입구 높이 80cm의 둥근 원통형의 굴엔 쌍봉 낙타모양의 두 돌기가 파여 올라가 있다. 이 굴은 청운대 천인 절벽의 정남면에 남향하여 인공으로 굴착한 횡혈(橫穴)석굴이다.

   겨울에는 햇볕이 굴 안에까지 들어가고,  여름에는 굴 안에 햇볕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 굴의 맞은편 굴에 아래로 100m 가량 떨어진 밑에 남에서 북으로 굴착한 석굴이 있다. 이 굴은 이 원효굴과 굴의 방향이 마주보고 있다.

   이 굴의 뒤에서 쳐다보면 원효굴이 보인다. 아마도 원효굴과 유관한 굴일 것이다. 제자 상좌나 시종자(侍從者)들이 거처했을 것 같다. 이 굴은 안으로 길이 1.7m, 굴 높이 1.8m, 넓이 1.7m이다.

   원효굴의 입구 오른편 절벽에 명문(銘文)이 조각되어 있다. 글씨 석자가 조각되어 있다. 가로 세로 7cm 가량의 크기로 썼다. 위의 글자는 서(誓)자가 확실하다. 그러나 밑의 두 자는 마모가 심하여 매우 판독하기
어렵다. 둘째 자는 당(幢)자로 읽힐 가능서이 농후하고, 셋째 자는 굴(窟)자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당(幢)자와 굴(窟)자를 합아면 서당굴(誓幢窟)로 판독하여 지금도 서당굴(誓幢窟)로 읽히고, 글자체는 해서체다. 이 서당굴(誓幢窟)은 원효가 유명하게 되자 그의 법사들에 의하여 기념하기 위하여 각자(刻字, 글자를 새기는 것)했다고 보겠다. 글자의 마모 상태나 자체로 보아 신라시대의 각서(刻書)로 보겠다.

    이 석굴까지 가는 길은 절벽에 옆으로 난 祖道를 따라 오르내리며 비스듬이 올라간다. 극히 위험한 길이고, 길 아래는 수백 미터의 절벽이다. 원효 당년에는 운제(雲梯) 위잔(危棧)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오랜 구비 전승과 이 원효굴은 신기하게도 부합되었다.

   이 굴은 오도암(悟道庵)에 딸린 수도석굴이다. 이 굴은 천고의 신비 가려 운무속에 감춰져 내려왔다.
오도암은 1963년이래 폐사가 되어 유허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기왓장과 주초와 맷돌 바위만이 널려있고, 빼어난 상호의 불상과 고탱화가 당시까지 전세(傳世, 대대로 전하여 가는 것)되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이상이 발굴 당시의  내용이다.
해발 800m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남향으로 원효가 오도암(悟道庵)과 원효굴(서당굴)에서 오도했다는 전승은 사실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