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속의 미리사지(美理寺址)

팔공산 4천년의 자료을 인용

 

 

 

   미리사에 대한 기록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인용코자 하는 자료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서는 화엄학 십산의 절을 "중악 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북악의 부석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 보광사......"라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구도호부 고적조에서는, "해안현에 있다 견휜이 신라의 서울 가까운 곳에 다가오니 경애왕이 고려에 구원을 빌었는데, 견휜이 갑자기 경순왕을 세우고, 국고와 보배와 무기를 다 가져가며, 자녀들과 여러 공장(工匠)중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 태조가 정예기병 5,000으로 공산 아래 미리사 앞에서 견휜을 맞아 크게 싸웠는데, 장군 김 락과 신 숭겸이 죽고 군대가 패배 하니 태조는 겨우 몸을 피하였다." 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미루어 보건대, 미리사는 신라 시대 번창하였던 화엄사 10대 사찰의 하나였고, 그 앞에서 고려 태조가 목숨을 잃을 뻔했던 장소다.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태조가 전사라도 했으면 후삼국 통일은 누구의 손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통일을 못했다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미리사 위치를 (대구시사)나 (팔공산)에서 지묘등에 있는 표충사 자리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리사 - 화엄고찰이요, 어쩌면 우리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 가 지묘동에 있는 표충사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필자는 몇가지 사유를 들어 설명 하고자 한다.

    첫째는 지묘사 창건에 관한 (고려사절요)의 기록이고
    둘째는 대비사에 관한 전설이다.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10년 9월조에는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제하고 친히 정병 5,000을 거느리고 견휜을 공산 동수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휜 군사가 왕을 포위하여 심히 위급했으므로,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견휜이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군(약목)을 빼앗고 전야에 노적한 곡식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왕은 두 사람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김락의 아우 철, 신숭겸의 아우 능길과 아들 보(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동명이 옛 지묘사에서 이름을 따 지묘동이고, 장절공 신숭겸의 후손 신흠이 찬한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지비)에서 밝혔듯이 지묘사의 위치를 현 표충사 자리로 보는데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전술한 (대구지사)나 (팔공산)에서처럼 미리사가 현 지묘동 즉, 표충사 자리에 있던 절이라면 왜, 무엇 때문에 미리사를 활용하지 않고 다시 지묘사를 지어 그들의 명복을 빌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비록 태조 자신이 독실한 불교도이고, 당시 불교가 국교라 하더라도 절을 짓는 것 더구나 두 개국공신과 수많은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하여 짓는 절은 그리 옹색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경비 또한 적지 않았을 터이며 아직도 체제를 정비하지 못한 태조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으로 상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미리사는 지묘동에 있는 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미리사의 위치가 숙제로 남는데, 필자는 같은 동구 평광동 108번지 일대의 시량을 미리사지로 추정한다.  행정동명이 평광동이고 그 중에서도 제일 오지 마을인 시량의 원래 이름은 실왕이었다고
한다.

 즉 뜻풀이를 하면 '왕을 잃어버렸다'는 곳이다. 이 시량리 일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더니 어떤 사람이 골짜기에 기진 맥진하여 쓰러져 있었다. 나무꾼이 가지고 있던 밥을 주자 그는 맛있게 먹었다.

    나무꾼이 나무를 다 하고 내려오니 그 사람은 간 곳이 없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그가 고려 태조였다.  그 후로부터 사람들은 이 마을을 왕을 잃은 곳이라 하여 실왕이라 불렀는데 실왕이란 발음이 어려워 시량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량은 뒤쪽이 환성산이고, 앞은 좁디좁은 들이다.  경산시 하양과는 신령이라는 재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는 이 재를  넘어 대곡리를 지나 하향장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마을은 실왕에 대한 전설 외에 신숭겸 장군의 유허비가 이곳에 세워진 배경에는 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이 바로 미리사의 위치를 푸는 열쇠가 아닌가 한다.

   고려 말, 어는덧 지묘사는 폐사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지묘사에 있던 신장군의 영정을 이곳 대비사로 옮겨다.

   조선조에 들어와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에은 김철득이라는 돈 많은 아전이 있었는데 그는 좋은 묘터를 구해서 조상의 유택을 마련하여 자손만대에 발복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당시 서울에서 유명한 지관을 초빙, 명산으로 이름난 팔공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허탕을 쳤다.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대비사에 들렀다. 갑자기 지관이 손뼉을 치면서 이곳이 바로 명당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절은 개국공신 장절공의 영정을 봉안한 신성한 곳이라 두 사람은 매우 아쉬워했다.

 돈이 많은 김철득은 주지를 포섭했다.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던 주지가 김철득의 집요한 설득과 거금에 탐이 나 절에 불을 지르고 멀리 도망쳤다. 폐허가 된 대비사 자리에 김철득은 자기 조상의 묘를 썼다.
 그후 김철득의 비행은 관찰사에게 알려지고 묘터는 파헤쳐지고,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는 구전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대비사가 곧 미리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약 미리사 말고 전설처럼 대비사가 이 시량에 있었다면 반드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구 부읍지)등에 기록될 것인데 어떠한 기록도 발견할 수 없고, 미리사와 대비사는 글자로나 발음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긴 하나, 이야기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구전 되어 오면서 혹은 보태지거나 삭제되거나 와전되면서 절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령을 넘으면 바로 하양이니 경주를 초토화시킨 견휜군사들이 영천~하양을 거쳐서 이곳으로 회군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 할 수 있고, 아니면 당시 동수회선의 전장이 실은 지묘나 파군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곳 시량리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졌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지묘동에 지묘사를 창건한 연유는 그곳에서 너무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 했기 때문이고, 가장 극적인 -신숭겸, 김락이 전사하고 태조가 간신히 몸을 추스린- 격전 지와 미리사가 있던 곳은 평광동 시량마을, 지금의 유허비각 부근으로 주장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일대를 아직도 '절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미리사는 화엄 십찰의 한 가람으로 어쩌면 오늘날 화엄사나 해인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 흔적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위치조차 잘못 알려져 있는 것 같고. 우리나라 역사가 뒤바뀔 만한 격전장의 주전선이었던 곳이 역사의 뒤안에 묻힌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참고로 당시 미리사가 있던 해안현을 한번 살펴보자.
   불로천과 금호강의 범람으로 해안현의 치소(治所)였을 불로동과 봉무동 일대의 땅은 어느 곳보다 기름지고, 따라서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흔적이 남아 있으니 이른바 봉무동 토성과 불로동 고분군이 그것이다.

   고분의 발굴 결과를 보면,  내부는 냇돌이나 깬돌을 사용하여 사방벽을 쌓고 굵직한 판석을 덮은 장방형의 석굴형인데 출토품으로 금제,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 무기들이 나온 것이 가야 문화권이었던 비산동과 내당동의 고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당시 이 일대가 신라 문화권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구시역의 변천)책에서 대구라는 이름은 경덕왕이 757년 지방 제도를 정비할 때 수창군의 한 현으로 등장하는 것이 처음인데 공교로운 사실은 지금의 칠곡 1.2.3동과 동명 일대의 팔리현, 성서 다사, 하빈면 일대의 하빈현, 월배 화원 옥포 일대의 화원현은 수창군 영현이나 이 해안현은 장산군(경산)에 소속되었다가 고려 현종 때에 와서는 멀리 경주 속현이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조선조 초에 다시 대구로 들어오긴 하나 불과 금호강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도 먼 경주 속현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고분군의 양식이 강안에 있는 비산동과 내당동 그것과 약간 상이하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말하듯 일찍부터 다른 문화권 즉 신라 문화권에서 있었던 데 연유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장산군에는 해안현 말고도 두 현이 있었는데, 여기에 의하면 해안현의 본디 이름은 치성화현 즉 일명은 미리였다는 상실이다. 따라서 미리사의 사명은 결국 이지방의 본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앞서 해안현의 치소를 불로봉무로 비정(대구부사는 입석동) 하였지만 그 영역은 어딘지 알 수 없다. 다만 지형적인 여건을 감안, 추리해 본다면 동촌 일대와 미리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평광동과 도동, 지금의 공산 1.2동을 포함한 범위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