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사

전통사찰 등록 : 88년 7월 28일 / 중대동 7번지

 

 

 


   동화사의 말사인 파계사는 신라 애장왕 5년(804년)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 절의 이름은 절의 좌우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9군데나 되므로 이 물이 흩어지지 못하게 잡아 모은다는 뜻에서 파계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입구는 진동루 누문을 지나 절마당에 들어가면 중심 전각이 원통전이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특이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원통전 현판 글씨는 장중한 필체로 송우암과 송동춘의 서체인 양송체에 해당한다.
 적묵당과 설선당이 동서 요사인데 적묵당에 종무소 간판이 걸려있다.

   순조 6년(1806년)에 경상도 관찰사 김희순이 써넣은(영종대왕 원당 사적)이란 사적기에 의하면 이 파계사는 숙종 19년 계유10월5일 밤에 숙종 대왕이  "산승(山僧)이 대전(大殿)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남대문 밖에 나가 스님이 있는지 알아보게 하니 마침 파계사의  영원선사가 묘향산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문 밖에서 쉬고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숙종은 그를 수락산에 보내 백일 칠성기도로 왕자를 빌게 하였더니, 숙빈 최씨에게 태기가 있어 이듬해 갑술(1694년) 9월 13일에 영조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숙종은 영원 선사에게 현응이란 시호를 내리고 파계사를 숙빈궁의 원찰로 하여 내탕금 3천냥으로 칠성전을 짓게 하고 영조 11세(1704년) 때에는 친필로 자응전이란 현판을 써 붙이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2년(1696)에는 기영각을 지어 열성 위패를 봉안하게 함으로써 왕가의 원찰로 격상시켜 놓았다. 이후 영조가 등극하자 왕비인 정성왕후는 그 내력을 알고 이 절을 자신의 원찰로 삼은 다음 영조 8년(1732년) 임자에는 영조의 어의를  하사하는 등 각별한 후의를  베풀어 왕실의 원찰로 확고한 지위를 다져 놓는다.
그래서 이곳이 관음기도 도량이 되어 원통전이 중심 전각이 되었던 것이다.

    파계사는 신라 애장왕 5년(804년)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원통전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은 선조 38년(1605년)에 계관법사가 중창하고, 숙종 21년(1695년)에 현응조사가 다시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기와 지분 건물로 자연석 주초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함께 발견된 한지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에 의하면 건륭 5년(1740년) 경신년에 대법당을 개금하고 불상과 나한을 중수했으며, 성상의 청사상의로 만세유전을 빌면서 복장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계사 원통전(把溪寺 圓通殿, 유형문화재 제7호)

파계사 목관음보살좌상(把溪寺 木觀音菩薩坐像, 보물 제992호)
파계사 영산회상도(把溪寺 靈山會上圖, 보물 제1214호)
파계사 설선당(把溪寺 設禪堂, 문화재자료 제7호)
파계사 설선당(把溪寺 設禪堂, 문화재자료 제8호)
파계사 적묵당(把溪寺 寂默堂, 문화재자료 제9호)
파계사 진동루(把溪寺 鎭洞樓, 문화재자료 제10호)
파계사 기영각(把溪寺 祈永閣, 문화재자료 제11호)
영조대왕의 도포(英祖大王의 道袍, 중요민속자료 제220호)

후불탱화
                후불탱은 뜻밖의 관음탱이 아니라 미타탱으로 대형인데 깁 바탕에 금채(金彩)를 많이 써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숙빈궁이 시주(施主)가 되었기 때문인 듯 하다.
                화기(畵記)를 확인할 수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같은 기법으로 그려진 삼장탱화에
                강희 46년(숙종33년 1707)의 작화 기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동시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화원(畵員)은 의균, 성익, 체환, 석민, 회징, 삼학으로 동화사 극락전 미타탱을 그린 화원(畵員)
                과 대웅전 삼장탱을 그린 화원(畵員)이 섞여 있어 그사이에 이 탱화가 그려진 사실을 짐작케
                한다.
                동화사 탱화보다 휠씬 정성들여 그린 이 탱화는 당시 궁정 취향을 엿볼 수가 있다.

영조 :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별칭 : 휘(諱) 금(昑), 자 광숙(光叔)
         주요저서는 「자성편(自省編, 1746)」「정훈(政訓, 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