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의 연혁

고대시대(古代時代)






 

    구석기나, 신석기시대의 유물, 유적이 발견된바 없고 월배면 유천리, 화원면 천내리 등지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무문토기, 간돌칼 등이 출토되었고 화원면 천내리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으므로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기문화가 발전하면서 주민(住民)의 수가 늘어나고 사회분화(社會分化)가 진전되면서 이 지역이 몇 개의 지역집단(地域集團)으로 나누어지고 소국(小國)(성읍국가, 城邑國家)단계로 성장하여 삼한(三韓)시대에는 변한(弁韓)에 속하였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삼국시대(三國時代) 달성은 신라(新羅)가 팽창하면서 지역의 소국(小國)들도 5∼6세기 초에  신라(新羅)에  복속(服屬)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新羅) 행정체계인 군현체제 아래서 달성군일대는 위화군(胃火君, 대구 가창면 일원)과 다사지현(多斯只縣, 하빈 다사면 지역), 설화현(舌火縣, 지금의 화원), 현풍을 상호 영속(領屬)관계가 성립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위화군(胃火君)이 수창군(壽昌君)으로, 하빈현(다사지현(多斯只縣)의 개명), 해안현(치상화현의 개명), 화원현(설화현의 개명), 현효현(玄驍顯, 추량화현에서 개명)으로 고쳤다.  또 수창군(壽昌郡)이 하빈현, 화원현을 영속(領屬)하였으며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 지금의 경산)에 영속(領屬) 되었고, 현효현(玄驍顯)은 화왕군(火王郡, 지금의 창녕)에 속하였다. 특히 현효현(玄驍顯)에는 지방군단(地方軍團)인 십정(十停)의 삼량화정(三良火停)이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839년(문성왕 1)에 김우징(金祐徵)이 난(亂)을 일으켰을 때 이곳 달구벌(達丘伐)전투에서 승기를 잡아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하였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시대(高麗時代) 달성군지역은 후삼국의 혼란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고려(高麗)의 삼국통일이후 정치의 중심무대가 개경(開京)으로 옮겨지면서 신라(新羅)와 달리 비중이 낮아져 갔다.

  고려초기(高麗初期)에는 수성군(壽城郡) 대구현(大丘縣) 해안현(解顔縣)으로 나뉘어서, 수성군(壽城郡)이 대구현(大丘縣)을 영속(領屬)하고 있었고 해안현(解顔縣)은 장산군(獐山郡, 현 경산)의 영현(領縣)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1018년(현종 9)의 대대적인 군현개편과정에서 수성군(壽城郡)과 해안현(解顔郡)은 동경(東京)의 속군(屬郡) 속현(屬縣)이 되었고 대구현(大丘縣)은 경산부(京山府)의 14속현(屬縣)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현효현(玄驍顯)은 고려초에 현풍현(玄豊縣)으로 개명된 뒤 밀성군(密城軍)에 속하게 되었고 수성군의 속현이었던 화원현, 하빈현은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에 來屬되는 영속관계가 일어났다.

    고려(高麗)후기에는 각 행정단위에 수령(守令)이 파견되기 시작하면서 1390년(공양왕 2) 수성군에 감무(監務)가 파견되면서 해안현을 겸령하였으며, 같은해에 현풍현에도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을 예속하게 되었다.

    1143년(인종 21)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의 속읍(屬邑)이었던 대구현에 현령(縣令)이 파견되자 하빈현이 영속되었으며,  하빈지역도 대구와 같은 행정적 변화가 있었다.

    달성군지역은 1232년(고종 19)에는 몽고의 침입을 받았고 1382년(우앙 8) 왜구의 침입도 받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로서 호구(戶口)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1394년(태조3년)에 대구현(大丘縣)이 수성현(壽城縣)과 해안현(解顔郡)을 영속(領屬)하여 현령(縣令)이 파견된 현풍현과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에 예속된 화원현을 제외한 달성군지역 일대가 행정적으로 대구에 속하게 되었다.

   1419년(세종1년)에는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하게 되었으며 1466년(세조 12)에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는 등 정치적, 군사적 비중이 높아져가면서 1601년(선조 34) 경상도감영(慶尙道監營)설치가 되면서 화원현까지 대구에 속하게 되었다.

   현풍현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鎭管體制)의 확정 이후 대구도시의 좌익(左翼)에 편입되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달성군 지역은 사림파(士林派)의 중심인물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이 배출된 곳으로 그를 배향(配享)하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 1604년에 건립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는 곽재우(郭再祐)가 현풍현 토족(土族)과 백성(百姓)들을 규합하여 현풍성밖에서 대파하였다.

근대(近代)
















    1895년(고종 32) 전국적인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달성군지역은 대구군과 현풍군으로 나뉘어지고 이듬해 13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05년에는성주군 노곡면(盧谷面)이 현풍군에 편입되었으면 1914년 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대구의 시가지가 대구부로 승격되면서 대구군의 나머지 지역과 현풍군이 통폐합되어 달성군으로 되었다.

  개화(開化)의 물결이 밀려 들면서  1899년 달성학교(達成學校)를 효시(嚆矢)로 초등교육기관이 생기고, 1906년에는 계성학교(啓聖學校)가 설립되어 이듬해 개교한 신명학교(信明學校)와 더불어 근대적 중등교육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 되어 교육, 문화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朝鮮國權回復)단 중앙총부(中央摠部)도 이 역에서 태동(胎動)하였으며 1919년 3. 1독립만세운동에서도 4월 26일과 28일 공산면(公山面)일대에서 채학기(蔡學基)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된 바 있다.

   1922년에는 가창면에서 소작쟁의(小作爭議)가 일어났으며 군내 전역으로 확대되어 월배, 논공, 해안등지에서 소작조합(小作組合)이 조직되면서   농민이 중심이 된 민족 운동이 일어났으면, 민족실력 양성운동의 한 갈래인 청년운동도 활발하여 11개의 단체가 되어 활동하였다.

현대(現代)







 

    현대(現代) 1945년 광복 이후 대구는 해외 귀환 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고 사회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미군정(美軍政)이 지속되던 1946년 10월1일 좌익(左翼)의 교묘한 선동에 의하여 10.1폭동사건이 곧 달성군으로 파급되어 경찰서가 습격당하는 등의 혼란이 일어나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낸 뒤 진압되었다.

   대구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1958년 동촌, 공산, 가창, 성서, 월배면이 대구로 편입되었다가 1963년 동촌을 제외한 4개면이 환원되었으며,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으로 월배, 성서, 공산면이 다시 대구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