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대구의 인구

     부성(府城)이 있는 대구도시(大邱都市)는 지금의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 위에 축조되었던 성벽(城壁)에 돌려진 성내 시가지(城內 市街地)와 남문(南門)밖에서 서울 가도(街道)를 따라 서문(西門)밖을 지나 달성공원 앞까지, 또 동소문(東小門) 바깥쪽에 촘촘하게 모여서 성외(城外) 마을을 형성하였을 정도였고, 그 너비는 지금의 중구 구역(中區 區域)의 절반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주위의 산격동, 침산동, 비산동, 평리동에 부성(府城)으로부터 10里 내외의 거리를 두고 자연취락(自然聚落)이 형성되어 있었다. 부성(府城)과 이들 자연취락(自然聚落)과의 사이는 산발적(散發的)으로 조성된 경작지 외에는 자연상태의 구릉과 산간으로 남아있었다.

   부성(府城)이 구축되기 전인 世宗 1년(1419)에 大邱는 현치소(縣治所)에서 군치소(郡治所)로 승격  되었다. 승격된 이유는 大邱의 민호(民戶)가 1300戶가 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구분(區分)

호수(戶數)

인구(人口)

대구(大丘)

  436戶

1329人

수성(壽城)

  264戶

644人

하빈(河濱)

  351戶

1249人

해안(解顔)

  198戶

1203人

계(計)

1249戶

4425人


   세종실록에는 위와같이 같이 호수(戶數)를 기록해 두고 있다. 여기서 1300戶라는 내용은 대구군역(大邱郡域)이였던, 수성, 하빈, 해안의 민호(民戶)를 합친 호수(戶數)이고 大丘는 1329명에 지나지 않았다. 통계의 대상이 토착량민(土着良民)만이었다 하더라도 얼마되지 않는 수치이다. 

     그 후 300년이 지난 숙종 3년(1705)이 되면 13,520戶에 이르며 부성(府城)이 축조된 後인 正祖 13년(1789)에는 13,413戶이고 철종(哲宗) 3년(1858)에는 13,325戶였다. 그동안 군성(郡域)에 조금의 증감이 있기는 했으나 부성(府城)이 축조되어 도시(都市)에 변화를 가져왔더라도 급작스러운 인구증감은 없었다.
 

구분(區分)

한인호수(韓人戶數)

일인호수(日人戶數

대구(大丘)

     5,561(23,530人)

2,064(8,028人)

달성(達城)

  22,502(107,410人)

      228(647人)

계(計)

28,063(130,940人)

2,292(8,675人)


     그러던 것이 1899년에 이르러 대구군읍지(大邱郡邑誌)에 기록된 인구수(人口數)를 보면 44,801人(12,504戶)으로 되어 있고, 1910년에는 98,559人(韓人 91,977人 / 日人 6,492人 / 기타 90人)이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12년은 위와 같이 증가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기 직전인 1944년에는 달성군을 제외한 대구부역(大邱府域)만의 인구가 206,638人에 이르고 그 후는 아래와 같이 급격히 증가한다.
            

1950年

269,406人

1970年

1,063,513人

1955年

457,331人

1980年

1,604,934人

1960年

675,644人

1984年

2,012,039人

1965年

811,406人

1991年

2,236,025人


   1400년 무렵, 지금의 대구광역시와 비슷한 범위에 불과 1만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500년 후인 1900년 경에는 약 45,000명이 되었고, 다시 100년 후에는 2,500,000명이 넘게 된다. 그동안 대구군역(大邱郡域)은 논밭은 물론이고 자연구릉지까지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녹지(綠地) 대신에 住居아파트의 숲으로 바뀌는 변화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