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의 邑城(읍성)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 일본의 움직임이 심장치 않다고 여긴 조정은 방어책을 세워 城地(성지)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부산, 동래, 밀양, 김해, 다대포, 창원, 함안등의 여러 성을 증축하고 종래 성벽이 없던 대구를 비롯하여 칭도, 성주, 삼가, 영천, 경산, 하양, 안동, 상주 등의 邑城(읍성)을 새로 쌓게 하였다. 대구의 읍성은 이때 처음 축조된 것이다. 대구부사 尹晛(윤현)이 급히 선산, 군위, 안동 세 고을의 주민을 징발하여 선조 24년에 大邱邑城(대구읍성)을 완성하였다. 대구는 옛부터 조선과 일본의 사절이 왕래하는 요로에 위치하여 왜의 정세가 심상치 않을 때는 경상도 연해에 대한 방비도 중요하지만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중앙로선의 요지인 대구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大邱邑城(대구읍성)이 축조된 것이다. 이 때 쌓은 邑城(음성)은 토성이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대구가 함락될 때 파괴되고 말았으므로 그 규모 등 구체적인 것은 알 길이 없다.

   인조 때에 이르러 공산성, 독음산성 등에 대한 축성의 필요성이 논의되다가 1639年(仁祖 17年)가산산성이 축조되었다. 아마 산성의 축조가 급한 나머지 대구의 읍성 축조는 뒤로 밀려 기회를 얻지 못하여 늦어진 듯하다.

   1735年(英祖, 영조 11) 3月에 慶尙道觀察兼大丘都護府使(경상도관찰사겸대구도호부사)로 赴任(부임)했던 閔應洙(민응수)가 나라에 建議(건의)하여 이듬해 正月 8月에 돌을 다듬기 시작하여 同月(동월) 12日에 城(성)터를 닦고 嶺南監營(영남감영)의 石城(석성)을 쌓기 始作(시작)하였다. 그해 4月 25日에 體城(체성)이 完成(완성)되고, 6月 5日에 女堞(여첩)이 完成(완성)되었는데 四正門(사정문)은 雙虹門(쌍홍문)에 건축하였고, 巽方(손방, 東南問)과 乾方(건방, 西北問)에 暗間(암간, 夜間通行門(야간통행문))을 두었다.

    또 守城(수성)을 위하여 糧餉(양향), 錢布(전포), 器機(기기) 등을 비치한 修城倉(수성창)을 건립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城(성)의 둘레는 옛 土城(토성)보다 넓어서 總 2,124步(보), 女蝶(여접)이 819蝶(접), 城高(성고)가 西南(서남)은 18尺, 東北은 17尺, 後築廣(후축광)이 7步(보), 높이가 3級(급)이다.
   그 후 130여년이 지난 1870年(高宗 7)8月에 읍성을 크게 수리하였다. 읍성이 축조된 이후 修城倉(수성창)을 두어 때때로 부분적인 수리를 해 왔지만 雉堞(치첩)이 무너지고 문루가 썩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수리를 한 것이다. 당시의 국내외 정세가 성의 수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城(수성)공사는 元來(원래)의 體城(체성)을 더 높이고 擴張(확장)한 結果(결과) 新築(신축)이 97步, 改築(개축)이 118步(보), 補築(보축)이 1409步(보), 雉堞(치첩) 新築(신축)이 2680步(보)였다. 그리고 門樓(문루) 및 公 (공해) 新建(신건)이 72間(간), 重建(중건)이 37間(간), 重修(중수)가 57間(간), 公 (공해) 各處(각처) 補修(보수)가 256間(간)이었는데, 增設(증설)된 標樓(표루)는 南쪽 것이 宣恩樓(선은루), 東쪽 것이 定海樓(정해루), 西쪽 것이 籌勝樓(주승루), 北쪽 것이 望京樓(망경루)였다. 또 中間에 4個의 砲樓(포루)세웠고, 石墩(석돈)도 新築(신축)하였다. 樓(누)에는 丹靑(단청)을 올리고 雉堞(치첩)은 白灰(백회)로 粉裝(분장)하였는데 총 經費(경비)가 7萬錢(만전)이 들었다 한다.

   그런데, 과연 이 대구성은 지금의 어디쯤에 있었을까?
   옛 기록에 따르면 대구에는 신라시대에 石城(석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 공원으로 되어 있는 달성공원인지 어딘지 확실치 않다.
   大邱府(대구부)의 서쪽 40리 지점에 둘레 9백 44척, 높이 4척의 돌성이었고, 성안에는 큰 샘과 못이 각각 두개, 그리고 軍倉(군창)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 거주지가 점점 발전함에 따라 이조 초기에 성을 구 신천둑까지 확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구성은 지금의 약전골목(南城路, 남성로)에서 종로로 들어가는 길이 T자형인 곳에 남문을 두고 이것을 정문으로 하여 남문에는 『嶺南第一關(영남제일관)』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남성로를 거쳐 중앙파출소 앞, 또 거기서 동성로로 올라와 옛 법원 근처에 동문을 내고, 이것을 『鎭東門(진동문)』이라 했다.

   중구 보건소 앞이 북문으로 『拱北門(공북문)』이라 일컬었고, 옛 조흥은행 대구서 지점 앞에 서문이 있어서『達西門(달서문)』이라 했다. 성은 지금의 동성로, 북성로, 서성로, 남성로가 옛 성 자리였다.

   성위에는 방어 및 사격용으로 토담을 쌓았으며, 높이 1m정도 내지 60㎝간격의 구멍을 내 놓았다. 이 구멍은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한 것으로 밑으로 향한 것과 정면으로 향한 것 두 종류가 있었다.
   성안 중심지에 도호부(혹은 감영)가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자리이다. 서북쪽 모퉁이에는 형장이 있었고, 그 외는 주민들이 흩어져 살필 있었다. 성밖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으나 훨씬 뒤인 이조 말에 와서는 동서문밖에 시장이 생기고 연병장과 여관 등이 줄지어 생겼다.

   그후 일제초기 이 성은 우리 시민에게 민족 정신을 강조하는 상징이 되었던 것인데, 교통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일인들이 觀察使(관찰사)를 시켜 뜯게 했다(이때의 觀察使(관찰사)는 박중량이다. 이때 시민들은 觀察使(관찰사)가  일인으로부터 돈을 받고 성을 뜯었다고 하여 비난이 자자했다고 한다.

   『성벽이 낡아 토석이 곳곳에서 붕괴되어 통행에 지장이 있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니
      성벽을 철거해 버리면 넓은 5간 길이 생기고 길 좌우에 보기 좋게 민가를 지을 수 있으니
      대구 부청으로 하여금 주관케 하여 이 공사를 시행케 하고자 하오니 허가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광무 10년 10월 경상북도 觀察使(관찰사) 서리겸 대구군수』

   이것은 大邱邑城(대구읍성)을 헐기 위해 한일합방 직전에 중앙에 보낸 서류의 한 귀절이다.
   그러나 중앙에서는 그것을 허가하지 않아서 뜻을 이루지 못 했었다.
   이듬해 3月 1日자로 다시 보고서를 내어 대구 시민에게 부역을 시켜 성을 뜯어내고자 했으나 그 때도 역시 중앙의 정부에서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城은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1903年에 철도국과 일본 군대가 협의하여 동문밖 일부를 이미 철거한 일까지 있었다. 도시의 발전을 저해하는 성벽을 철거해야 한다고 일본 거류민단이 맹렬히 주장했는데, 이에 호응한 당시의 觀察使(관찰사) 서리(박중양)는 드디어 성을 철거하고 말았다.

   중앙에서는 지시를 무시했다고 대노하여 서리를 징계하려고 했으나, 일본 침략자의 원흉인 伊藤博文(이등박문)이 그를 옹호하여 징계안을 철회시키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사실인즉 거류민단이 성을 철거하고자 미친 듯이 날뛴 데는 그들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진정 도시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첫째는 이 성의 철거로 한국의 민족의식을 소멸시키고 둘째는 그 성터의 땅을 자기들이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성들 뜯어 그 자리에 길을 낸다고 하고선 길 폭은 좁히고 남은 땅은 일인들이 집을 지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구 시가에서 동성로, 남성로, 북성로, 서성로의 노목이 좁은 원인이 바로 그 때문이다. 당시 일본 거류민단의 대구 성지 개수 청원서를 내를 길 폭을 5간으로 하고 남는 땅은 99年간 부상 사용권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일인들끼리 싸움이 붙어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7간 도로를 내기로 합의하고 공사에 착공했던 것이다.
   다음해 봄 공사는 무사히 끝났다. 그러나 남문 하나쯤은 남겨 놓아 오늘날 大邱邑城(대구읍성)의 옛 자취를 더듬게 할 수 있었더라면 그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大邱邑城(대구읍성)의 성벽은 1906年(광무 10년) 경상도 觀察使(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였던 朴重陽(박중양)이 일본 거류민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부의 승인도 없이 철거하였다. 왜적을 막기 위하여 쌓았던 성벽이 왜인의 건의에 따라 철거되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참고문헌 : 대구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