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공원(達城公園)

소재지 : 중구 달성동 294-1, 사적 제62호
觀風樓(관풍루) : 문화재자료 제3호  
  
    달성공원(達城公園)은 대구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달성이라는 이름은 옛날 대구를 달구벌(達句伐), 달구불(達句火), 달벌(達伐), 달불(達弗)이라 표기한데서 비롯되었는데 높은 평지, 부락, 도성의 뜻인데 부근의 각종 출토물로 보아서 이곳이 선사시대부터 부족국가를 이루고 자연적 구릉을 이용하여 그 위에 토성을 쌓은 성지(城趾)였다. 또 고려 때부터 달성 서씨(達城 徐氏)의 세거지였으나  조선조  세종때 나라에 헌납하였고 임진왜란 와중인 선조 29년(1596), 경상좌우도가 통합되면서 경상감영이 되기도 하였다.

   
관풍루(1910년대)                                     관풍루(현재)         

    1906년 일본의 침략으로 일인들이 저네들의 신사(神社)를 짓고 대구읍성 철거시 경상감영(현 경상감영공원) 정문에서 관풍루觀風樓, 망경루(望景樓, 현재없음)등을 옮기고 공원화하였던 것을 해방후 1963년 사적 제62호로 공원 조성을 시작, 일인의 신사 등을 철거하는 등 공원으로 정리 조성하였다. 공원에는 느릅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의 전통수목과 우리나라 최초의 방사식 동물원, 이상화(李尙火) 시비(時碑),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 동상, 의병장 허위(許爲) 사적비, 석재 서병오(徐丙五) 선생 예술비, 어린이 헌장, 달성 서씨 유허비 등이 있으며 종합문화관과 1995년에 개설한 향토역사관이 있다 .
    달구벌시대의 이 토성은 어느 때쯤 쌓아진 것인가. 우리 민족의 토성축조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의 토성을 본받은 것으로 보는데 낙랑군의 설치가 기원전 2세기  말이었으므로 우리 나라의 토성은 그 후에 축조되었다고 보고 있다.

    
        달성공원                                       달성공원의 회화나무

    지금의 서울 성동구(城東區)내인 광주 풍납리(廣州 風納里) 토성은 그곳에서 출토된 목탄(木炭)을 재료로 하여 방사성탄소 측정을 한 결과 기원 2세기경의 유적으로 추정되었다. 달성(達城)도 이와 비슷한 연대 즉 기원 2세기 전후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달성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수축(修築)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방의 중요한 진성(鎭城)의 몫을 하였으므로 "달구벌"시대의 토성의 모습이 많이 변하여 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지리지(地理誌)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달성에 대하여
   "대구부의 서쪽4리에 석축이 있는데 주위는 944자이고 높이가 4자이며 안에 세곳의 우물과 두 곳의 못이 있고 군창이 있다"
  "在府西四里 石築 周九百四十四尺 高四尺 內有三井二池 有軍倉(재부서사리 석축 주구백사십사척 고사척 내유삼정이지 유군창)"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달구벌시대의 토성을 후대에 돌로 쌓은 것이다. 석축은 경상도 속찬지리(慶尙道 續撰 地理誌)에 의하면

   "산성은 대구부의 서쪽 2리에 있으며, 1390년에 돌로 쌓았다. 둘레는 451보이며 높이는
    6자 군창이 있고 우물 넷이며 여름 겨울에 마르지 않는다"
   "山城 在府西二里 許洪武庚午石築周 廻四百五十一步 高六尺有軍倉井 冬洪載庚午
    산성 재부서이리 허홍무경오석축주 회사백오십일보 고육척유군창정 동홍무경오"

는 고려 공양왕(高麗,  恭讓王 2年) 즉 서기 1390년이다.

   이 기록으로 당시 대구의 행정중심지는 동쪽 2리거리에 있었다니 현재의 대구도심으로 보인다. 석성(石城)의 둘레가 944자 또는 451보라고 하였는바 현재의 넓이는 동서로 약 380 m 남쪽 약 470m이다. 성안에 우물과 못이 있다는 것은 산성이 반드시 있어야 할 조건인 바 우리 나라 산성의 특징이다.

   중구 남산동 소재 달성 徐氏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있는 비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達城(달성)에 관한 기록이 있다. 즉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해 오던 서침(徐沈)이 달성(達城)에 은거하다가 현재의 남산동 일대로 옮겨 왔다. 세종(世宗) 때의 일인데 세종이 일본에 대한 방위 때문에 달성에 성을 쌓으려고 徐氏에게 남산동 땅(南山 故驛基(남산 고역기))을 주고 서로 바꾸었다. 조성에서 교환에 대한 보상을 논하였을 때 서침은 사양했다. 다만 대구사람들이 빌려 먹은 관곡(官穀)의 이자(利子)를 한 섬에 5되씩 감해줄 것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달성(達城)을 나라에 준 혜택을 대구 읍민들이 고루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1906년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신사(神祠)를 달성안에 건립하여 참배를 강요했는데 해방뒤 신사는 철거되었다.
    관풍루(觀風樓)는 1601년(선조 34년)에 경상감영(慶尙監營)의 정문으로 세워졌던 것인데 1906년(高宗 10) 대구의 읍성(邑城)이 철거될 때 달성공원으로 옮겨왔다. 2층으로 되어 있고 기와를 이은 목조이며,  건평은 17평, 1975年 2月 5日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달성공원(達城公園)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詩人) 이상화(李相和)  의 시비(詩碑)가 있다.  상화(尙火, 이상화의 아호)는 1901年 4月 5日 大邱에서 출생하여 일제의 어두운 시대를 살다가 해방되기 2年전인 1943年 3月 2日 불우한 세대의 삶을 마쳤다. 시비(詩婢)에는 그가 서울 중앙중학을 졸업하고 동인지「백조(白潮)」에 18세 때 발표하여 문단을 뒤흔들었던 시「나의 침실로」가 새겨져 있다.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 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
    상화 시비의 글은 문인 김소운(金素雲)씨의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詩人(시인) 李相和(이상화)는 西紀(서기) 1901年 辛丑(신축) 4月 5日 又甫(우보) 李時雨公(이시우공)의 第2子로 태어나  西紀(서기) 1943年 癸未(계미) 3月 2日 43歲(세)로 세상을 떠나니 大邱는 그 出生地(출생지)요, 終焉地(종언지)이다. 그의 詩歷(시력)은 「白潮(백조)」 同人(동인) 시대에 시작되었으니 香氣(향기)롭고 분방한 그 詩風(시풍)은 초기의 조선시단에 있어서 淸新(청신)한 一魅力(일매력)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침실」을 비롯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逆天(역천) 」 
「離別(이별) 」등이 있으니 碑面(비면)에 새긴 詩句(시구)는 「나의 침실 」中(중)의 一節(일절)이다. 흘러간 물의 자취를 굳이 찾을 것 아니로되 詩人의 조찰한 생애를 追念(추념)하는 뜻과 아울러 뒤에 남은 者(자)의 허술하고 아쉬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자는 생각으로 작은 돌을 새겨 여기 세우기로 한다. 戊子(무자) 正月(정월) 金素雲識(금소운지) 題簽葦昌(제첨위창) 吳世昌(오세창) 84歲書(세서) 詩句遺撚三子(시구유년삼자) 太熙(태희) 11歲書(세서) 背銘竹濃(배명죽농) 徐東均(서동균)"

   해방뒤인 1948년 백기만(白基萬) 김소운(金素雲)씨 등의 힘으로 세워졌다.
   상화의 시는 백기만씨가 쓴 「尙火(상화)의 古月(고월)」에 수록되어 있다. 백기만 씨는 여기서 그와 가장 친했고, 동인활동을 했던 상화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었다.

   「불타는 조국애가 있고 하천(下賤)」의 농부를 동정하는 눈물이었고 흙과 자연에 동화하는 순정이 있고 침략일제(侵略日帝)를 타도하는 절규가 있고 민족해방을 숙원하는 단심이 있다. 빼앗긴 들은 빼앗긴 조국강산(祖國江山)을 이름이요,  조국을 빼앗기도록 저능한 백의동포(白衣同胞)들이 사는 황폐 참담한 지역에 화려한 봄이 오는 것을 탄식하며 경종을 울긴 것이다. 終聯(종련)의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부르짖음이다」

    달성공원에는 천도교(天道敎)를 창도(創道)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의 동상이 있다. 포덕(布德, 天道敎(천도교)의 傳道(전도)를 일컬음 ) 105년이 되는 1964年 3月 21日 그가 순도(殉道)한 대구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이다. 최재우는 대구 장대(將臺)에서 순도했다. 오른손을 풀어 하늘을 가리키는 것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사람이 하늘을 믿어 끝내는 하나가 되는 경지이
른다는 것)의 진리를 깨우치는 모습이라 한다. 비문은 박종홍(朴鍾鴻)씨의 글이다. 

참고문헌 : 건들바위
                대구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