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행적과 지명

지명의유래

    독좌암     무태      반야월      불로동      실왕리(시량리)     살내      안심        연경
    
은적사     임휴사   장군수      지묘동      파군치                 태조지   해안

 

                표  충  재
   924년, 고려와 후백제는 양국간에 서로 인질을 교환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경상도 북부지역(문경, 성주,영천)이 잇따라 고려에 귀부한데다 고려에 질자로 보낸 진호(견훤의 생질)가 숨지면서 평화는 2년여만에 깨지게 된다.

  크게 노한 견훤은 고려와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는 한편 친 고려적인  신라 왕실을 응징하고자 했다. 이보다 앞서 경애왕은 왕건을 경주로 초청했는데 이를 차단하려는 것도 중요한 의도였다.

 

 

   927년 9월 (삼국사기엔 11월 또는 10월). 백제군이 고울부(영천)까지 진격해오자 경애왕은 고려에 위급함을 알렸다. 왕건은 공훤을 사령관으로 삼아  1만명의 군사를 보내 구원케 했다. 그러나 이들 군사는 견훤의 군사와 싸웠다는 기록도 전혀 없으며 더 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행방이 묘연하다. 아마 견훤군과 싸워 궤멸된 것으로 추측된다.

  견훤은 곧바로 신라의 도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비빈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아마 수도경비사령부격인 남산성의  군사력에 의존하기 위해 그곳으로 옮겼거나, 시조묘인 나을신궁에  들러 조상들의 음우를 빌기 위해 이동중에 들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이미 초겨울철이라 포석정에서의 유상곡수 연회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미 후백제의 침공을 알고 고려에 군사를 요청해 둔 상태에서 비빈들과 질펀한 연회를 가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다.

  백발이 성성한 61세의 나이에 신라 도성에 입성한 견훤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의 나이로 종군하면서 처음 서라벌에 들어왔던 견훤이 46년만에 다시 경주 땅을 밟은 것이다. 휘황찬란한 신라 도성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배신감과 비애 뿐이었을게다.  고려와의 힘겨운 쟁패과정에도 신라가 한 몫 거들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견훤은 신라를 마구 짓밟았다.

  친고려  정권 제거가 목적이었던 만큼 견훤은 재빨리 경애왕의 이종사촌인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옹립하고 창고에 보관된 각종 보화와 무기를 빼앗아 철군했다.

  왕건은  공훤의 군대가 궤멸되고 경애왕이 자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전쟁터에  나섰다. 든든한 막료 신숭겸, 김락과 함께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충주에서 문경새재를 넘은 왕건의 군대는 점촌,상주, 선산을 지나 팔공산 기슭에 이르렀다. 이때 이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견훤이 반드시 이 길을 지나 회군을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이유는 동화사와 파계사가 모두 견훤 세력과 깊이 밀착되어 있는 진표율종(眞表律宗) 즉 백제계 법상종에 속한 사찰로 신라 영토내의 견훤 세력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견훤이 이곳을 통과하리라는 태조의 신산(新算)은 맞아 떨어졌지만  이 일대가 모드 견훤의 세력 근거지이라는 것을 태조 왕건은 미처 계산을 넣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태조의 전락을 간파 한 견훤의 역습에 태조 왕건은 대패하여 목슴조차 위태로운 지경을 맞는다.

  이때의  이야기가 지명에 남아 있는데 서변동 일대의 무태(無怠)와 연경(硏經)  마을이 그것이다. '무태'라는 마을 이름은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는 설과 이곳을지날 때 지역 주민들이 부지런함을 보고 태만한 자가 없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또 '연경'은 이곳을 지날 때 마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들려와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왕건  군대는 뒤이어 지묘동과 미대동을거쳐 동화사(동수.桐藪) 일대의 사찰군사력을 평정하고 백안동, 능성동 일대를 지나 영천쪽으로 향했다. 동화사는 당시 백제계 법상종 사찰로 견훤세력의 근거지였다.

  영천이 후백제군에 함락된 상태에서 더 이상 전진이 어렵다고 판단한 왕건은  은해사 부근에서 매복을 한 채 되돌아 오는 후백제군을 치기로 작전을 세웠다.

  양측에서 다 그럴만하다는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겠지만 현재의 기록으로는 후백제군이 이 길로 온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왕건은 공산 동수 군사를 깨뜨리면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왕건의 매복 작전도 이들에 의해 견훤측에 알려졌을 것이다.  아무튼 왕건의 작전은 처음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공산  동수에 이르러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견훤을 갑자기 들이쳐 격파하니 처음에는 견훤군이 갈팡질팡하였으나 점차 수습되면서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도리어 왕건군이 포위 속에 들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은 견훤이 고려군의 매복 사실을 알고 역매복 작전을 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투를 이끌었던 후백제군의 장군은 견훤의 넷째 아들 금강왕자였다.그는 이전투로 "지략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약 왕위계승 서열1위로 떠오른다. 뒤에 첫왕자  신검의 반란으로 견훤이 유폐될 때 살해됐다.

  전투에서 패한 왕건은 영천 서쪽 30리 지점의 조그만 봉우리를 거점으로 군대를 수습했다. 이 봉우리가 '태조지(太祖旨)'라고 전하나 현재 그 위치를 알 수는 없다(자료에 의하면 은해사 입구가 첫 조우지라고 하는데 이 곳이 태조지(太祖指)이라 한다). 뒤이어  밤을 틈타 왔던 길을 되돌아 퇴각했다. 지묘1동과 지묘 3동   사이의   나팔고개는 퇴각하는 고려군을 뒤쫓는 후백제군의 나팔소리가 산을 울렸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이들은   다시 서변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살내(전탄.箭灘)'를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양측이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쏜 화살이 강에가득하여 그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저탄(猪灘.물살이 센 깊은 곳)'이라고 적혀 있는데 대구읍지에는 '전탄'으로 기록돼 있다.

  이때 고려군에는 증원병이 합세, 약간의 기력을 회복했던 것 같다.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밀어붙이며 지묘동 왕산(王山) 아래 미리사(美利寺) 부근까지 진출했다.

  양군의 전투는 이곳에서 가장 격렬하게 벌어져 결국 고려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말이 난다.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리는 길목에 있는 고개 이름이 '군사를 깨뜨린 고개'라는 뜻의 파군치(破軍峙)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왕건이 목숨을 보전한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신숭겸의 지략 덕분이었다.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바꿔 입고 달려 나와 후백제군 속으로 뛰어 들었다. 힘이 다한 그가 후백제군에게 숨지자 승전에 취해 어수선한 틈을 타 왕건이 몸을 빼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지묘동(智妙洞)인 것도 신숭겸 장군의 지혜가 교묘했다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

   김락 장군마저 전쟁중에 숨져버려 거의 홀몸이 된 왕건은 예상 도주로를피해 동화천을 따라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봉무동  토성 산기슭에 왕건이 도주하다가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座巖)'이라는 바위가 남아있다. 봉무동 노인회관 부근 실개천옆 산기슭에 있는 높이 1.5m, 가로 2m, 세로 4m 남짓의 바위다.

  그러나  이곳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파군재와 1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으로, 전투에 크게 패해 겨우 목숨을 구해 달아나던 왕건이쉬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게다가 바위 한쪽이 조금 기울어져 앉아서 쉬기에도  그다지 편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검은색 표면은 꺼칠꺼칠할 정도로 크게 볼품이 없는 모습이다. 호사가들이 뒤에 덧붙인 이름으로 여겨진다.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12호인 독암서당의 안내문에 "서당의 서쪽에 독좌암이  있어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서당과 독좌암은 500여m 떨어져 있으며 팔공산 진입도로를 가운데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어 서당 부근에서 독좌암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불성실한 안내문에  답사객들이 독암서당 주변 야산을 헤매기 일쑤다. 문화재가 아닌 독좌암에는 물론 안내문조차 없다.

   뒤이어   도동 부근 들판을 지날 때 후백제군이 있지 않을까 근심했다가 무사히  빠져나가면서 왕건의 얼굴이 펴졌다고 해서 이곳 지명이 '해안(解顔)'이 됐다고 하는 속설도 전한다.

  그러나  해안은 이보다 200여년전인 신라 경덕왕때 이곳 지명을 '해안현'이라고  했던 기록이 전하고 있어 공산전투의 치열함을 이야기하면서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왕건이 도주하다 불로동에 이르자 노인과 부녀자는 모두 달아나고 어린아이들만  남아있어 '불로동(不老洞)'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뒤이어   왕건은 넓은 들판을 피해 평광동 산기슭으로 도주로를 잡았다. 평광동  뒷산에서 나무꾼을 만난 왕건은 그에게서 주먹밥을 얻어먹고 산을 넘어 동구 매여동 쪽으로 향했다.

  나무꾼이 나무를 다하고 내려와보니 그 사람이 사라졌는데 뒤에 마을 사람들이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곳을 '왕을 잃은 곳'이라는 뜻의  '실왕리(失王里)'로 불렀다. 뒤에 음이 변하여 '시량이' 또는 '시랑리'라고 부르게 됐다. 평광동 앞 마을의 작은 하천은 시랑천이다.

  시랑리에는 현재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영모재와 비석이 있으며, 비문에 따르면  왕건이 뒤에 신숭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곳에 대비사(大悲寺)를 세웠다고 한다.

  시랑리에 있는 영모재와 비석을 찾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평광동 부근은 물론 시랑리에서도 안내문을 찾을 수는 없다. 비석으로 가는 길도 풀이 우거져 바로 앞에 두고 놓치기 일쑤다.

  이 일대는 너무나 깊은 산속이다. 아마 파군재에서 크게 패한 왕건은 이곳까지  거의 무작정 달아났을 것이다. 독좌암에서 쉬고, 해안현에서 얼굴이 펴졌다는 둥의 이야기는 대부분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시랑리  부근에서 겨우 한 숨을 돌린 왕건은 계곡을 따라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다 산을 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매여동을   비롯한 이 일대를 '안심(安心)'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이르러 왕건이  비로소 안심하게 됐다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또 '반야월(半夜月)'이라는  지명도 하늘에 반달이 떠서 그의 도주로를 비춰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에  이른 왕건은 수성구 고모동 지역을 지나 앞산 북쪽 산기슭을 따라 성주지역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산계곡 어디에도 왕건의 얼이 스며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앞산 쪽으로는 은적사(隱跡寺, 고려 태조 18년(936년) 영조 스님이 창건)에서 왕건이 달아나던   도중 혹시 추적해 올지도 모를 후백제군을 따돌리기 위해 자취를 감췄다는  뜻을 담고 있고 은신하면서 지냈고, 안일사(安逸寺)에서 조금은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다가 마침내 임휴사(臨休寺)에서 편히 쉬었고 안지랑골에는 왕건이 물을 마셨다는 '왕정(王井)'이 남아있으며 이 물을 장군수(將軍水)라고 한다는 전설(傳說)로 지금까지 절 이름도 그대로 불리어진다.

   다시 김천(金泉)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에 이르러 능여선사(能如禪師) 도움으로 재기(再起)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능여선사(能如禪師)가 하룻밤 사이에 짚신 2천켤레를 삼아 진중(陣中)에 바치며 큰 짚신을 요해처(要害處)에 놓아 두어 태조를 무사히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말띠 해가 되면 큰일을 이루어지리라 예언(豫言)하여 희망을 준다.

   태조 왕건은 이 팔공산 참패로 한 동안 견훤에게 수세로 몰리게 되니 구 신라 지역내의 영토를 상당히 침탈 당하는 것은 물론 그 15년(932년)에는 태조의 세력기반인 예성강의 수군 선단까지 견훤의 기습으로 대파 당하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각처의 호적들을 회유하고 신라와의 맹약(盟約)을 공고히 하여 국세를 회복한 다음 17년(934년) 5월에 후백제와 대치 상태에 있는 예산진(禮山鎭)에 친림(親臨)하여 천하만민에게 내리는 조서에서 인의(仁義)로 보국안민(報國安民) 할 뜻을 친명함에 민심이 모두 왕건태조에게 기울게 도니다.

    맹장으로 이름난 선주 긍준(兢俊)의 항복을 받자 웅주(熊州 , 공주) 이북30여성이 소만만 듣고 항복해 왔다고 한다. 전투의 대세는 태조 왕건에게 기울게 되었고 18년(935년)네 후백제 왕실에서 골육간의 왕위 다툼이 일어 견훤이 그 아들들에게 유폐되었다가 고려로 탈출해 오는 뜻밖의 천운을 만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신라의 경순왕도 나라를 태조에게 바치니 후삼국 통일에 기반이 된다. 마침내 태조19년(936년) 6월에 견훤이 적자(賊子)를 주멸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 후백제 토벌군을 일으켜 이를 토멸한다.

   고려가 통일되자 태조 왕건은 팔공산 전투에서 자신을 대신해 죽은 장군과 군사를 위하여 공훈을 표창하고 그 넋을 기리기 위하여 지묘사을 세운다.

   따라서 대구 일원은 당시 승자(勝者)였던 견훤에 관한 고사(古事)는 없고 패자(敗者)인 왕건에 관한 전설만 가득하니 참으로 옛부터 대구(大邱)는 보수(保守)와 의리(義理)의 도시인가 생각한다.

   당시(當時)는 승자였어도 정권(政權)을 창출하지 못한 것은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 아닐까??

   풍수의 비조(鼻祖)로 알려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개성(開城)을 방문하는 길에 왕건의 집앞을 자나다가 필시 이 집안에서 장차 삼한을 통일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그 선각국사 도선(道詵)의 스승이 바로 경주사람으로 전라도 땅 곡성(谷城) 태안사(泰安寺)에서 동리산문을 연 혜철(彗哲)로 은혜사 창건주였으니 팔공산은 왕건과 인연이 깊었던 인물이다.

 

참고문헌 : 영남일보, 팔공산4천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