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川(신천)                                                                                                     

   이조 중엽까지 이 하천은 현재의 新川(신천) 물줄기는 원래의 것과는 달랐다.   新川(신천)의 舊水路(구수로)는 龍頭山(용두산) 밑에서 舊 曉大(효대)앞→水道山(수도산)→東麓→半月堂(반월당)→東山病院(동산병원)→達西川(달서천)으로 흘러서 琴湖江(금호강)에 合流(합류)하였다. 따라서 장마철이 되면 大邱(대구)분지의 中心部를 물바다로 만들어 住民(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峨嵋山(아미산)이란 지금의 덕산동 반월당 뒷편의 주택지가 된 언덕이다. 복명학교을 넘어 옛 대도극장까지에 이르는 이 언덕이 峨嵋山(아미산)이며, 그 당시엔 잡목이 무성한 야산이었다.

   그 밑 지금 YMCA회관 있는 곳까지는 논밭이었고  대구 성안은 지금의 약전골목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峨嵋山(아미산) 밑으로 흐르는 이 하천은 대구 사람들에게 큰 두통거리였다. 걸핏하면 물이 넘어 논밭을 휩쓸어 버리는가 하면 때로는 성내에까지 물이 넘쳐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 강으로 말미암아 성안은 항상 습기에 차 있었고, 여름이 되면 강물이 불어 길을 끊어 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어쨌든 이 하천은 그 당시 대구 사람들에겐  큰 두통거리어서 수로를 변경할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1776年(正祖, 정조 1)7月 李(이서, 1732∼1794)가 大邱判官(대구판관)으로 赴任(부임)해 와 물줄기를 중심부로 흐르지 않게 돌리려 했다. 그러나 막대한 費用(비용)이 들어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으나 부임한지 2年(연) 뒤인 1778年(연)에 私財(사재)를 털어 단시일 내에 끝마쳤다. 이로써 大邱(대구) 中心部(중심부)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한지 수 백년동안의 숙원사업이었던 水路(수로) 변경이 이루어지게 되어 주민들과 당시 교동에 있었던 孔子廟(공자묘)에 대한 침수위험도 막게 되었다. 주민들은 李判官(이판관)이 쌓은 新川(신천) 堤防(제방)이 中國(중국) 宋(송)나라의 碩學(석학)이던 蘇軾(소식)이 抗州刺使(항주자사)로 있을 때 築造(축조)한 堤防(제방)을 蘇公堤(소공제)라고 命名(명명)한 것을 본 떠서 李公堤(이공제)라  칭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新川(신천)을 이 때부터 '新川' 또는 '새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후 1797年 1月에 東上面과 西上面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 碑(비)를 세웠다. 碑(비) 
의 側面(측면)에 「丁巳 正月 日 東西上立」이라고 새겨져 있고, 後面(후면) 碑文(비문) 에 「判官李候諱李(판관이후이서)」란 文面(문면)을 參酌(참작)해 보면 1794年 그가 죽은  3年 뒤 丁巳 正月 日에 세운듯 함)  원래 碑(비)가 서 있었던 곳은 현재의 壽城橋(수성교) 서쪽 堤防(제방)의 남쪽 100m 지점이었으나 그 附近(부근)에 防川市場(방천시장)이 생기면서 繁榮會(번영회)가 發足(발족)되어 파괴된 碑閣(비각)을 초라하나마 다시 세우고 원래 같이 碑閣(비각) 안에 있던 郡守(군수) 李候範善永世不忘碑(이후범선영세불망비)」도 함께 保存(보존)하였다.

   또 번영회에서는 방천시장이 李公堤(이공제)를 끼고 있기 때문에 매년 음력 1月 14日 밤에  이 두개의 비석에 享祀(향사)를 지내 왔다. 그러다가 1971年 11月 20日 堤防(제방)위의 道路擴張工事(도로확장공사)로 현재의 位置(위치)인 中區 大鳳1洞 655번지로 移建(이건)하였다.

   1986년 新川高速道路(신천고속도로) 擴張工事(확장공사) 當時(당시) 수성교 서편 지하도 지하에서 또 다른 李公堤碑(이공제비)가 發見(발견)되었다. 이 碑(비)는 1808年(純祖, 순조 8)에 세운 것으로 1797年에 세운 碑(비)가 초라하여 그의 업적을 영구히 기리고자 다시 비를 세운다고 碑文(비문)에 새겨져 있어 함께 현 위치에 保存(보존)하게 되었다가 지금은 상동교 근처로 이건 하였다.

참고문헌 : 구의 누정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