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들바위 앞을 흐르던 내(川)가 어찌하여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가??

    일제강점(日帝强占)이 있기 전인 1900년경은 우리나라로써는 개화기(開化期)였다. 1904년에 제작된 시가지도(揷圖 1)를 보면, 그 무렵 부성(府城)이 있는 대구도시(大邱都市)는 지금의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 위에 축조되었던 성벽(城壁)에 돌려진 성내 시가지(城內 市街地)와 남문(南門)밖에서 서울 가도(街道)를 따라 서문(西門)밖을 지나 달성공원 앞까지, 또 동소문(東小門) 바깥쪽에 촘촘하게 모여서 성외(城外) 마을을 형성하였을 정도였고, 그 너비는 지금의 중구 구역(中區 區域)의 절반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부성(府城)이 축조되던 무렵만 하더라도 대구는 부성(府城)과 성벽(城壁)에 인접하여 형성된 민가구역(民家區域)을 제외하고는 녹지(綠地)로 덮여 있다시피했으나, 人口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지상(地上)의 경관(景觀)을 급속하게 바꿔 버렸고 나아가서 중기(重機)를 동원한 토목공사로 지형(地形)에까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중구(中區)에서 하천(河川)이 사라지게 된 것도 자연의 힘에 의해서 파생되었다기보다는 이러한 사람들의 활동으로 인해서 야기되었던 것이다.    

    현치소(縣治所)에서 군치소(郡治所)로 승격될 무렵의 1400년대에 대구인 서거정(大邱人 徐居正)이 읊은 대구십경(大邱十景) 가운데 입암어조(笠巖釣魚, 입암에서 고기낚기)라는 詩가 있다.    
 
烟雨空澤國秋(연우공몽택국추)    이슬비 자욱이 가을을 적시는데
垂綸獨坐思悠悠(수륜독좌사유유)    낚시 드리우니 생각은 하염없네
纖鱗餌下知多少(섬린이하지다소)    잔챙이야 적잖게 건지겠지만
不釣金驚鉤不休(부조금오조불휴)    금자라 낚지 못해 자리 뜨지 못하네

(공몽) : 이슬비가 보얗게 내리거나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어둑침침한 모양
垂綸(수륜) : 낚시줄을 늘어뜨림, 낚시질을 함
纖鱗(섬린) : 작은고기
金驚(금오) : 금자라

  입암(笠巖)의 위치에 대해서 몇몇 이설(異說)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지금의 건들바위로 비정하고 있다. 현재 건들바위 옆에 아스팔트의 큰 도로가 있을 뿐 냇물은 고사하고 흐르는 물기조차 없는 정황에서는 조용하고 한가로운 냇가에 유유자적하게 고기를 낚고 있는 모습을 그려볼 수는 없다.

    1920년대에 인쇄된 대구시가지도(大邱市街地圖)를 보면 건들바위 앞으로 냇물이 흘렀고 평시에는 수량(水量)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도에서 이천교 일대에 침수되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하류쪽인 건들바위 앞 내에도 냇물이 흘렀고 고기가 놀 정도였다고 본다.

    더욱이 냇가에 인가(人家)가 없고 상류(上流)쪽의 범람에 영향 받을 수 있는 자연상태의 옛날에서는 건들바위 옆에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그 앞을 흐르는 냇물이 어울려서 시상(詩想)을 떠오르게 함직한 경관(景觀)을 이루었던 것으로 상상된다.

    많은 수량은 아니였다 하더라도 건들바위 앞은 이천교(梨泉橋)에서 대백프라자가 자리하는 신천(新川) 쪽으로 높은 제방을 쌓아서 흐름을 돌리게 하고부터 냇물의 흐름은 끊어지고 저습지(低濕地)로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저습지(低濕地) 상태는 6.25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지속되어 미나리꽝으로 이용되었었다. 또 저습지로 될 무렵의 주변 경관은 절벽 아래의 저습지 가까이는 논과 밭으로, 좀 높은 평지는 과수원으로 된 전원(田園)이었고, 민가(民家)는 병영(兵營)앞 길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 후 저습지마저 없어진 것은 6. 25사변 후 인구증가가 급격해지면서였다.   건들바위에서 아래쪽인 유신학원 네거리, 시립도서관, 시청옆, 칠성시장 안을 통과했던 내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천교에서 흐름이 막히게 되면서 건천(乾川)이 되어 1930년대의 도시구획정리 때 흔적조차 소멸하게 된다.

     내(川)가 지도상에 남아 있었던 1920년대만 하더라도 냇가 주변은 학교, 대구부청사, 공장 등의 공공건물이 간간히 자리하고 있었을 뿐 밭과 과수원이 조성된 전원지(田園地)였다.

    그리고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건들바위 앞을 흘렀고 내를 따라 유명한 세 개의 샘이 살아 있었다. 하나는 최상류인 수도산 아래에 있는 배나무샘이고, 둘째는 시청 가까이에 있는 한국전력회사의 길 건너 골목안에 있는 참나무샘이며, 셋째는 경대교 가까이에 있는 칠성동의 삼익아파트 앞에 있었던 감나무샘이다.

    지금은 내(川)의 흐름도 없고 샘은 폐기되어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내(川)가 남아 있을 때는 일년 내내 샘물이 마르지 않았던 샘으로, 용수에 많은 도움을 주어 왔다.

    동문(東門) 밖의 넓은 평지는 일제강점(日帝强占)이 있기 전에 이미 북문(北門) 밖의 넓은 땅과 더불어 대부분 일본인(日本人)의 소유지가 되다시피 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마치 일본 속의 한 시골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1904년에 일본 거주민이 동문(東門) 밖과 북문(北門) 밖 일대의 토지를 측량하여 구획정리하게 된 것도 그 사이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 된다.

    일제시대에 들어서면 시가지명(市街地名)을 일본식(日本式)으로 바꾸고 성곽(城郭)을 헐어서 동문(東門)과 서문(西門) 바깥쪽의 낮은 지대를 돋우웠다. 그리고 일찍부터 동문(東門) 밖에 흘렀던 시냇가 일대를 일본거류민(日本居留民)들의 새 도시로 가꾸었다. 이러한 사정은 1920년대의 일제(日帝) 주요공공건물이 건들바위 옆을 흘렀던 냇가를 따라 자리잡은 현상에서 알 수 있다.

   당시 건들바위에서 윗쪽으로는 일본군병영(日本軍兵營)과 일인(日人)의 대구중학(大邱中學)이 있고, 아랫쪽으로는 각급 학교, 일본군장교숙소, 편창공장, 상업학교, 사범학교, 일본인봉산소학교, 형무소(日本軍將校宿所, 片倉工場, 商業學校, 師範學校, 日本人鳳山小學校, 刑務所)가 자리하였고 더 내려가서 동문(東門) 밖 가까이에 이르면 법원(法院)과 각종 관사, 일본인 여학교, 대구의전, 일본인소학교, 부립도서관, 부청, 동양척식회사, 대구발전소,(官舍, 日本人 女學校, 大邱 專, 日本人小學校, 府立圖書館, 府廳, 東洋拓殖會社, 大邱發電所) 각종 日人들의 공장, 큰 병원 등 일본식민지(日本植民地)의 중요 기관이 냇가를 따라 자리하고 있었다.

    1936년에 수립된 대구시 구획설계도에는 건들바위 앞을 흘렀던 하천 부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설계도면에는 하천을 따라 공공의 큰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반듯한 근대적 넓은 폭의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일본인들이 밀집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하천의 기능을 잃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강점(日帝强占)이 있기 전에 일본인(日本人)들이 성벽(城壁)을 헐어서 동문(東門) 밖 낮은 지대를 메웠다는 것은 하천부지를 일찍이 일본인(日本人)들의 무상점유지(無償占有地)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시대(日帝時代) 그리고 해방, 6.25전란(解放, 6.25戰亂)을 겪었을 때까지도 대구는 문화도시, 교육도시(文化都市, 敎育都市)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大邱는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있었던 곳으로 관아도시(官衙都市)였던 것은 사실이나 개화기(開化期) 이후에 문화도시, 교육도시(文化都市, 敎育都市)라 일컬었던 것은 근대적 도시(近代的 都市)로서 일찍이 계획(計劃)된데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日本人을 위한 도시계획(都市計劃)이였고 한인(韓人)을 위한 설계는 아니었다. 이는 한인(韓人)이 밀집(密集)한 구성내( 城內)의 도시계획(都市計劃)이나 부성(府城) 남(南)쪽과 서(西)쪽은 해방이 될 때까지 후진성(後進性)을 면치 못했고 일본인이 개척한 북문(北門) 바깥과 동문(東門) 바깥 쪽의 건들바위 냇가 일대는 일찍이 반듯한 도시로 건설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현재 대구도시(大邱都市)의 내막을 보면 인구(人口) 250만이 모여 거대도시(巨大都市)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도시(近代都市)가 갖추어야 할 도로, 교통망, 공공시설(公共施設), 문화시설(文化施設)등이 태부족할 뿐 아니라 무계획적이다. 근대도시구성(近代都市構成)에 합리성(合理性)이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나 크게 보면 팽창하는 도시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핵심산업이 없다는 것과 예측되는 인구팽창에 따르는 섬세한 도시계획(都市計劃)이 수립되지 못했던 탓이라 하겠다.

    도시계획(都市計劃)이 엉망이 된 시초는 따지고 보면 임자 없는 땅은 말이 없고 편히 처리할 수 있고 주인 있는 땅은 어려워서 손을 대지 않으려 한데 있다. 이는 일본인(日本人)들이 개화기(開化期)에 주인없는 건들바위 앞 냇가를 점령해서 불용하천(不用河川)으로 매립(埋立)한데서 입증된다. 서거정(徐居正)의 조용한 냇가 분위기가 일본인(日本人)의 강제점거(强制占居)로 또 그들의 도시계획(都市計劃)으로 사라지게 했고 마침내 매연의 도로로 변하게까지 된 것은 도시발전계획에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말한다.